올해는 안암총학생회(안암총학) 50주년이다. 안암총학은 온갖 풍파를 겪었다. 독재 정부의 탄압을 받아 기능이 중지되기도 했으며, 학생세력·학교당국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그라진 학생들의 관심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교생(안암캠퍼스)을 대표하는 유일한 학생자치기구로서 끝없이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때로는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고, 때로는 독선을 낳기도 했다. 고대신문은 안암총학 50주년을 맞아 고대신문 속 안암총학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안암총학의 탄생
안암총학이 생기기 이전인 1950년대에는 ‘학도호국단’이란 정부 어용단체가 학내자치를 주도했다. 학도호국단은 대대·중대·소대·분대 별로 구성된 군대식 단체로, 총무·감찰·선전·문화·체육·후생·훈련 등의 활동을 했다.
4.19혁명 이후 혁명을 이끈 학생운동세력은 학원민주화를 위해 안암총학 설립을 논의했고, 1960년 11월 12일, 1대 안암총학이 첫 발걸음을 뗐다. 첫 학생주도 학내자치기구의 설립이다보니 시행착오를 겪었다. 설립 초기, 안암총학은 조직의 세부 운영이 기존의 학도호국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과 간접선거로 탄생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지난 10일 각 대학학생회장선출을 완료한 후, 12일에는 전체 대의원 총회에서 총학생회장을 선출함으로써 근 한 달 동안에 걸쳤던 치열한 선거전도 그 막을 내렸다.
상대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유진홍군과 농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000군이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한 가운데 총 유권자 140명 중 119명이 출석해 9표 차로 상대의 유진홍군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1960년 11월 12일, 260호>

“본교의 대내외적인 문제를 수행해감에 있어 회칙에 규정된 바와 같이 강력한 학생회의 결성과 함께 세부적인 활동항목을 발표할 것입니다만, 학교당국 및 학생회원 여러분들의 협력 없이는 전통과 신중은 무시될 것이며 학원의 기반은 무모하게 파멸될 것입니다.”
<1960년 11월 12일, 260호 당선자 인터뷰 중>

안암총학은 점차 정체성을 찾아갔다. 안암총학은 ‘평화통일론’을 지지했고, 전교생이 참여하는 정치투쟁을 자제했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등이 실시했던 국민계몽대활동의 정치적 성격엔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절량농가 구호운동’과 같은 빈곤 계층을 위한 사회 활동은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총학생회는 절량농가 구호사업뿐 아니라 농촌의 개발사업 전면에 대해 지성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각종 사업을 전개할 것이라 밝혔다. 또한 백해무익한 학생단체나 만들어 이권운동을 하기보다 실제적인 국가이익을 위한 사업에 고대생의 정신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굳은 신념을 표명하고 있으며 학교당국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망하고 있다.
<1961년 8월 26일, 283호>

박정희 군사정권의 등장 이후 안암총학은 학생단체·단과대학생회와 함께 군사독재에 항거했다. 항거는 1971년 대통령선거 부정선거와 1972년 유신체제의 등장 시기에 절정에 달했다.

총학생회 부활 움직임이 지난 21일부터 총학생회 부활 준비위원회(위원장=이영동·농학4)의 주관 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4년 5월 28일, 973호>


잃어버린 7대의 안암총학
197,80년대 안암총학은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아 기능이 중단됐다. 안암총학 설립이 50년주년임에도 43대의 안암총학만이 선출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안암총학 활동이 잠시 주춤하자 학생들은 실망감을 표했다. 학생들의 여론을 수렴한 안암총학은 1974년 후반부터 다시 적극적인 투쟁에 나섰다. 당시 안암총학을 비롯한 본교생들의 저항은 정부가 ‘긴급조치 7호-고려대학교 휴교령’을 선포할 정도로 치열했다.

제15대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의사를 학생회 활동의 지침으로 삼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 여론조사에는 총 5천 8백여 학생이 응답했는데 ‘총학생회에 관한 사항’에서 학생들은 ‘총학생회는 무능하다’(45%), ‘답변할 가치 없는 집단’(37%)라고 답해 거의가 불신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총학생회를 비롯한 전반적 학생활동 침체의 반영으로 보인다.
<1974년 10월 8일, 704호>

지난 10일 1천여명의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졌다. 이윤세 총학생회장이 유신체제 반대를 골자로 한 구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이후 ‘유신헌법 개정, 구속학생 석방, 언론자유 보장, 학원사찰 중지’ 등 4개항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어 1천여명의 학생은 이틀째 농성을 이어갔다.
<1974년 10월 22일, 705호>

휴교령에도 저항이 끊이지 않자 정부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해 전국 대학교의 모든 학생활동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본교 교무위원회는 학생자치활동을 금지했고, 안암총학의 기능도 정지됐다.

본교의 총학생회를 비롯한 모든 학생자치활동기능이 정지되었다. 교무위원회는 지난 5월14일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사상·종교 써클 12개를 해체시켰다.
<1975년 6월 3일, 719호>

안암총학이 사라짐에 따라 4.19혁명 이후 사라졌던 학도호국단이 부활했고, 기존 학생자치단체 중 일부는 학도호국단 산하에 속하게 됐다. 그러나 학생들은 호국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문교부에서는 모든 학생자치활동을 학도호국단산하에 흡수·통합시키고 일체의 독립된 학생자치활동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기존 학생 써클은 모두 자동 해산되었으며 이들 써클 중 일부는 학도호국단 소속으로 활동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1975년 7월 15일, 724호>

지난해까지 매년 개최되어 본교생의 많은 참여와 지지를 받아오던 춘계학술대회가 돌연 유산되었다. 지금까지 춘계학술대회는 본교의 몇 안 되는 대표적 학술대회의 하나로써 호국단 주최 행사 중에도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호국단 측은 이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호국단 측은 이를 변명하려 하면서 사무착오라고 했다가 의도적인 중단이라고 하며 혼선을 빚고 있다.
<1979년 4월 3일, 833호>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안암총학 부활이 학생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됐다. 학교와 정부는 1980년 1월 학생자치활동을 규제했던 조항을 삭제했다. 이어 총학생회칙이 제정되고 첫 전교생 직접선거가 이뤄졌다.

본교는 지난 21일 긴급조치 해체 이후 ‘학원의 자율화’와 ‘학원 내 문제의 점진적 해결’을 위해 그동안 학생활동을 규제한 학규 조항을 삭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정정 신청안을 문교부에 제출했다. 학교당국은 그동안 꾸준히 진행되어온 학칙개정작업을 17일 교무위원회에서 최종확정했다.
<1980년 1월 29일, 855호>
 
75년 15대 총학생회를 끝으로 만 5년간의 공백기 후 다시금 총학생회는 부활되었다. 본교사상 처음 전교생의 직접선거로써 총 유권자 수 1만 3백 72명 중 6천 7백 82명이 투표하여 66%의 높은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16대 총학생회장에 신계륜(행정3) 군이 당선되었다.
<1980년 4월 15일, 863호>

그러나 5.17군사쿠데타 이후 등장한 신군부세력의 탄압으로 총학생회는 반년도 지나지 않아 기능이 정지됐다. 학도호국단이 다시 출범했지만, 학생들은 ‘학원탄압도구’라며 호국단을 거부했다.

본교 호국단 간부들의 MT가 지난 7일부터 2일간 남이섬에서 있었다. 그런데 이번 MT에서 현 호국단간부들이 지난번 선거를 부정하고 재선거를 실시해야한다는 단과대학생장 후보들을 폭행해 몇몇 단과대학생장 후보들과 현 호국단 간부들이 다치는 소동을 벌였다.
<1981년 7월 21일, 892호>

본교 써클 회원들은 호국단 집행부를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국단 문화부에서 써클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상’(1%), ‘중상’(26%), ‘중하’(43%), ‘하’(30%)인 것으로 나타났다.
<1981년 9월 22일, 897호>

1983년 12월, 전두환 정부는 제적생들의 복교를 허용하는 등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했다. 그 틈을 이용해 학생들은 ‘고대자율화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켜 지하 써클 위주의 학생운동을 체계화하자는 논의를 진행했고 이는 안암총학의 부활로 이어졌다.

지난 2월28일 정부가 학원자율에 관한 사항을 발표한 이후, 본교에선 학생자치활동의 새바람이 일고 있다. 운영위원회, 단과대 총회, 제적생 3차 총회, 공청회 등 학원민주를 향한 학생들의 활동이 점차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1984년 3월 12일, 963호>

총학생회 부활 움직임이 지난 21일부터 총학생회 부활 준비위원회(위원장=이영동·농학4)의 주관 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4년 5월 28일, 973호>

지난 17일 철야개표를 진행한 결과 총학생회장에 김영춘(영문81), 부총학생회장에 허인회(정외82) 군이 당선됐다.
<1984년 9월24일, 979호>

전대협 발족식이 지난 19일 본교를 비롯한 전국 95개 대학 4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남대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의장에 선출된 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전대협 발족선언문’에서 청년 학도가 나아갈 길을 “첫째, 외세배격과 독재종식을 통해 진정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할 것. 셋째,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그들과 강력히 연대할 것. 넷째, 학문사상의 자유를 쟁취하여 학원의 진정한 자유를 되찾을 것. 다섯째, 전면적인 백만학도의 단결과 통일의 결정체로서 전국학생총연합건설의 토대를 마련할 것”으로 제시했다.
<1987년 9월 1일, 1055호>


민주화 운동 이끈 안암총학
부활 직후 안암총학은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창립, 미 문화원 점거 농성, 건국대 농성 등을 주도하며 학생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정부의 학원소요에 대한 강경 대응책 발표 이후 지난 5일 본교에서는 처음으로 전학련 주최의 ‘민중 민주화 운동 추진 결성대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에서는 허인회(전학련삼민투위장·정외4) 안암총학생회장이 참가해 대회를 주도했다.
허 군은 “내일 ‘범국민 시국대토론대회’를 열기 위해 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만약 이 대회에 경찰이 투입될 경우 나는 분신자살하겠다”라는 말을 전하며 2L 가량의 휘발유를 몸에 뿌렸다.
<1985년 9월 9일, 1002호>

지난 달 28일 오후 1시부터 본교를 비롯해 서울대, 0대, 0대, 한0대 등 전국 22개 대학 2천 여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건국대 민주광장에서 열린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 직후 경찰의 학내진입에 투석으로 맞서던 1천여명의 학생들은 건국대 본관, 사회과학관 등 5개 건물을 점거, 4박5일 간 철야농성을 벌이다 지난달 31일 경찰에 전원 연행돼 현재 1천5백25명이 서울시내 24개 경찰서에 분산, 조사를 받고 있다.
<1986년 11월 3일, 1035호>

한 모군(신방2)은 “현재 나타나는 매스컴의 일방적인 왜곡보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학 내에서도 보다 냉철한 현실파악과 국민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한 순수성의 확보가 요구된다”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1986년 11월 10일, 1036호>

‘건국대 사태’ 이후 학생운동의 대중화 필요성이 제기됐고, 학생 대표기관인 안암총학의 역할이 부각됐다. 안암총학은 ‘서울 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결성을 주도했고, 서대협은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또한 안암총학은 8월 ‘전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결성을 이끌었다.

격동의 6월을 맞이한 본교에서는 이인영 총학생회장 석방과 군부독재 종식을 이슈로 내건 기말고사 거부를 단행했다. 지난 1학기 기말고사 총 응시율은 약 10%를 기록했다.
지난 6월 10일엔 각 단과대별로 6.10궐기대회를 가지고 농악대를 선두로 대운동장에 집결한 학생들은 본교 총학생회장이며 ‘서대협’의장인 이인영 군의 구출결의와 이 땅에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자주화를 이룩할 것을 다짐한 뒤 오후 4시부터 각 과별로 단을 편성하여 시청으로 출발했다. 이날 가두시위에 참가한 본교생은 약 5천명으로 추산되었다.
<1987년 8월 1일, 1054호>

전대협 발족식이 지난 19일 본교를 비롯한 전국 95개 대학 4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남대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의장에 선출된 이인영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전대협 발족선언문’에서 청년 학도가 나아갈 길을 “첫째, 외세배격과 독재종식을 통해 진정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할 것. 셋째,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위해 그들과 강력히 연대할 것. 넷째, 학문사상의 자유를 쟁취하여 학원의 진정한 자유를 되찾을 것. 다섯째, 전면적인 백만학도의 단결과 통일의 결정체로서 전국학생총연합건설의 토대를 마련할 것”으로 제시했다.
<1987년 9월 1일, 1055호>

▲ 1985년 11월 전국학생총연합은 군부독재타도 궐기대회를 갖고 군사정권을 상징하는 허수아비를 태우고 있다.


비운동권과 운동권을 나누는 현 총학생회 선거 상황에 대해 응답자의 53.8%가 ‘옳지 않다’고 응답했으며 그 이유로는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단순히 이분화 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54.0%)이 가장 많았고, ‘후보의 이념보다는 공약의 실행능력을 보고 뽑기 때문’(17.7%)이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이 옳다고 응답한 응답자중 46.9%가 ‘운동권과 비운동권 학생회는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라고 지적했으며,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31.3%)이라는 응답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2002년 12월 13일, 1442호>

‘연세대 사태’
1990년대 민주화가 진척되고, 대학생·국민의 관심이 다변화하면서 학생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등장했다. 한총련은 김영삼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했고, 정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1996년 8월 일어난 ‘연세대 사태’는 한총련과 정부 갈등의 정점이었다. ‘연세대 사태’는 안암총학을 비롯한 전국 대학 총학생회에게 큰 타격을 줬다.

‘원천봉쇄’ 방침 아래 진압에 나선 경찰은 11일부터 연세대 주변에서 교내 진입 학생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14일 오후에는 10여대의 헬기를 동원해 연세대 교정을 최루액으로 뒤덮으며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번 진압 과정에서 1천명 이상의 학생이 부상을 당했으며 경찰의 ‘시위가담자 전원 연행’ 방침에 따라 지난 86년의 ‘건국대 사태’를 능가하는 5597명의 학생이 연행됐다. 본교의 경우 구속자 23명을 포함, 이경호 세종총학생회장 등 1백 57명이 연행됐으며 특히 서규석(이과대 수학93)군은 전경이 던진 돌에 맞아 눈을 실명하기도 했다.
<1996년 8월 26일자 1268호>

‘연세대 사태’ 이후 정부는 각 대학의 한총련 세력을 색출하려 했고, 한총련 사무실이 있던 본교 내에도 진입했다. 이종철 29대 안암총학생회장이 연행돼 실형을 구형받는 등 안암총학은 큰 피해를 입었다.

지난달 28일 오전 5시경 서울지방 소속 전경 1천3백여명이 ‘한총련’ 간부 검거, 시위용품 및 이적표현물 압수 들을 위한 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교내에 침입했다. 경찰은 학생회관, 각 단과대 학생회실, 동아리방 등에 진입, 기물을 파손하고 잠자고 있던 학생 19명을 연행했다.
이어 30일 오전 2시경 경찰은 또다시 전경 9백여명을 동원, 학생회관과 자연계캠퍼스 학생회관, 경영대 학생회실 등에 난입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계캠퍼스 벽이 무너지고 학생 16명이 연행됐다. 31일 오전 5시경 이종철 안암총학생회장이 귀가 도중 잠복하고 있던 사복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
<1996년 9월 2일자 1269호>

경찰이 또다시 학내에 무단 침입해 학생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4시경 서울시 경찰청 보안관리과 소속 전경 4백여명이 학생회관을 수색, 학생 38명을 강제 연행했다.
<1996년 11월 18일 1277호>

검찰은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들어 이종철 안암총학생회장에게 실형 6년을 구형했다.
<1996년 11월 25일자 1278호>

30대 안암총학은 한총련 식 운동방식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고, 변화와 혁신을 주장했다.

“변화와 혁신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대표권을 위임받아 권력을 독점·분점하는 것이 아닌, 권력 자체를 ‘학생대중’과 함께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행동자치 위원회’ 건설 등을 통해 학생들과의 ‘수평적 연대’를 도모할 것이다.”
<1996년 11월 25일자 1278호, 30대 안암총학 당선자 인터뷰 중>

첫 비권 총학생회
IMF 이후 학생회는 학생들의 관심을 점차 잃어갔고 투표율이 50%를 넘기지 못해 연장투표를 실시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사회문제보다 학내문제에 더 신경을 써 학생들에게 다가가 보자는 안암총학 후보들이 점차 늘어났고, 35대 안암총학 선거에선 처음으로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됐다.

35대 안암총학 선거에서 ‘최초를 꿈꾸는 사람들’의 손창일(법과대 법학95), 팽성철(공과대 건축공98) 후보가 당선됐다. 안암총학생회정부회장 선거에서 비운동권이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달 29일 대강당에서 진행된 개표에서 ‘최초’는 전체 9천38표 중 3천1백50표를 획득해 ‘내일을 향해 쏴라’를 1천88표 차로 제치고, 25대 안암총학을 책임지게 됐다.
<2001년 12월3일, 1416호>

본교생 19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최초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란 질문에 절반의 학생들이 ‘선거 공약이 마음에 들었다’(50.0%)고 답했으며 ‘34대 안암총학에 대한 평가의 의미’(16.1%)가 뒤를 이었다.
<2001년 12월3일, 1416호>

35대 안암총학은 기존 학생운동세력과 다른 방식으로 학내문제를 대했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운동세력과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현재 안암총학과 단과대 학생회 측은 ‘등록금 인상저지’라는 원칙은 같지만 등록금 투쟁 방향에 대한 사소한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암총학은 등록금 인상 저지를 기본적으로 내세우되 등록금 동결이 불가능할 경우 인상분을 학생들의 복지로 돌려 인상분만큼의 실질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게 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단과대 학생회 측은 학생들의 복지뿐만 아니라, 등록금 동결을 목표로 삼고 있다.
<2002년 2월25일, 1418호>

등록금투쟁이 안암총학과 단과대 학생회가 계속되는 의사소통의 부재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미 학기가 시작되고 대부분의 학생이 등록을 마친 상태에서 앞으로 등록금투쟁의 귀추가 주목된다.
<2002년 3월4일, 1419호>

35대 안암총학은 비운동권 학생회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안암총학과 한양대 총학생회가 중심이 된 전국 규모의 ‘비운동권 총학생회 연합’은 서울·경기 지역의 약 15개 대학 총학생회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출범 초읽기에 들어갔다. ‘비운동권의 연합’이라는 낯선 실험의 성공 여부는 대학가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설왕설래를 낳고 있다.
<2002년 3월 11일, 1420호>

안암총학의 학내 사업은 △교내 소통을 위한 프로젝트 △도서관 개선 프로젝트 △학업과 관련된 모든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프로젝트 △고대 내의 어우러짐을 위한 프로젝트 △이동 총학생회 △고대의 세계화를 프로젝트 △취업만족 프로젝트 등이 있었다.
<2002년 11월21일, 1440호>

35대 총학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공약은 비교적 잘 이행됐지만, 실효성 부분에서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안암총학이 지난 10일, 11일 양일에 걸쳐 마지막 이동 총학생회(이하 이동총학)를 열었다. 이틀 동안 이동총학을 통해 문의, 건의한 학생은 10명 안팎에 불과하다. 이동총학은 이번이 여섯 번째이나 사물함, 스쿨버스 등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학생들의 참여가 저조했다.
<2002년 10월14일, 1437호>

35대 안암총학의 사업성과를 두고 학생들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본지가 지난달 "35대 안암총학의 지난 1년간의 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에 총 360명이 참여해 '매우 만족한다'(9.2%), '만족한다'(22.8%), '보통이다'(10.8%), '불만족스럽다'(12.8%), '매우 불만족스럽다'(44.4%)고 답해 35대 안암총학의 지난사업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2002년 12월 13일, 1442호>

한편, 당시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인식은 분분했다. 절반가량의 학생은 운동권과 비운동권을 나누는 인식을 부정적으로 바라봤지만,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많았다. 

비운동권과 운동권을 나누는 현 총학생회 선거 상황에 대해 응답자의 53.8%가 ‘옳지 않다’고 응답했으며 그 이유로는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단순히 이분화 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54.0%)이 가장 많았고, ‘후보의 이념보다는 공약의 실행능력을 보고 뽑기 때문’(17.7%)이 그 뒤를 이었다.
반면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분이 옳다고 응답한 응답자중 46.9%가 ‘운동권과 비운동권 학생회는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라고 지적했으며,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31.3%)이라는 응답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2002년 12월 13일, 1442호>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점, 몰랐던 점은 인정하고 배울 점은 배우고 싶다. 공존하는 학생회, 함께 끌어가는 학생회를 만들겠다. 각자 생각했던 학생사회의 모습을 공유하며 다양함이 공존하는 학생회를 만들고 싶다”
<2009년 12월 7일, 1631호, 당선자 인터뷰 중>


떠나간 학생들의 관심사를 찾아서
안암총학은 이제 학생들의 관심과 정체성을 찾아 표류하는 중이다. 학생들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 2006년엔 연장투표로도 투표율을 채우지 못해 선거가 무산되기까지 했다. 투표기간을 5일로 늘리고 모바일투표도 도입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진 못하고 있다.

투표율 50%미달에 대한 중앙선거관리위원 9명의 연장투표 추가 실시 불가 판단으로 860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39대 안암 총학생회장 선거는 무효화 됐고, 3월에 사상 초유의 재선거가 실시된다.
<2005년 11월 28일, 1523호>

처음으로 도입된 모바일 투표는 이번 41대 안암총학 선거의 투표율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당초 모바일 투표를 신청한 4582명의 학생 중 76.15%에 해당하는 3489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는 전체 투표참여자의 44.88%에 해당한다.
<2007년 12월 3일, 1575호>

40대 안암총학 ‘고대공감대2007’는 학내 ATM 수수료 무료화, 고파스 개설 등의 복지사업에 중점을 뒀고, 41대 안암총학 ‘고대공감대2008’은 학내복지사업과 더불어 사회현안에 대한 목소리를 내려했다. 몇몇 사업은 학생들의 관심을 이끌어내지만, 학생들의 무관심은 여전했다.

‘현재 총학생회를 지지하나’라는 물음에 ‘지지한다’(34.5%)는 답변이 ‘지지하지 않는다’(9.4%)에 비해 많았지만, ‘관심없다’(56%)는 답변이 과반이었다.
<2008년 11월 10일, 1599호>

42대 안암총학 ‘젊은 고대, 깨어나다!’는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의 관심이 멀어진 이유를 총학의 운영 미숙에 있다고 지적했다. 42대 안암총학은 왕성한 사회참여 활동과 등록금 투쟁을 벌였지만 만족도는 낮았고, 학생들과의 소통에 부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생의 관심이 부족해 총학을 비롯한 기층단위 학생회 운영이 힘들다는 말은 핑계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학생회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생의 관심이 멀어진 것이다. 앞으로 학우들의 힘으로 운영되는 총학생회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
<2008년 12월 8일, 1603호, 당선자 인터뷰 중>

본교생은 안암총학이 지난 1년간 가장 잘한 일로 ‘등록금 인하를 위한 노력’(34%)를 꼽았다. 안암총학은 등록금 동결이 결정된 이후에도 꾸준히 교육권 개선 요구를 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만족도는 낮았다. 등록금 인하 노력 4.7점, 교육환경 개선 요구 4.7점으로 나란히 낮은 점수를 받았다. 등록금 인하, 이공계 등록금 차등책정 철폐 같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009년 11월 9일, 1627호>

안암총학이 가장 부족했던 점을 묻는 문항엔 ‘학내 소통과 화합 유도’(28%)란 답변이 가장 많았다. 안암총학은 2학기 들어 학생들과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이동총학생회’를 운영했지만 응답자의 80%가 이동총학생회를 ‘모른다’고 답했다. 이동총학생회를 안다고 답한 학생 중에서도 ‘의견을 전하기 힘들었고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31%)는 응답자가 많았다. 본교생은 안암총학의 종합적인 소통·화합 노력에 4.6점을 줬다.
<2009년 11월 9일, 1627호>

43대 안암총학엔 ‘소통시대’가 당선됐다. 43대 안암총학은 학생들과의 소통을 통해 다양함이 공존하는 총학생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점, 몰랐던 점은 인정하고 배울 점은 배우고 싶다. 공존하는 학생회, 함께 끌어가는 학생회를 만들겠다. 각자 생각했던 학생사회의 모습을 공유하며 다양함이 공존하는 학생회를 만들고 싶다”
<2009년 12월 7일, 1631호, 당선자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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